제 24 대 진흥왕
신라의 대표적인 정복군주로서,
지증왕의 손자이자 법흥왕의 조카 겸 외손자라는 복잡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 갈문왕 입종이 조카와 결혼하여 법흥왕의 동생이자 사위가 되는 바람에 이런 이상한 신분이 되었으나, 족내혼이 만연했던 고대 신라에서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었고,
오히려 이러한 여러 겹의 신분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540년, 요즘이라면 중2병으로 몸살을 앓을 나이인 15세에 법흥왕의 뒤를 이어 옥좌에 앉았다.
7세라는 설도 있는데, 뭐가 되었건 아무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이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는데,
처음 1년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 태후가, 그 다음은 무려 10년 동안 친모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여, 26세가 되어서야 친정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지소태후의 권력욕이 대단하였거나, 아니면 애가 사춘기를 심하게 앓아 영 마음이 놓이질 않았거나, 또는 둘 다였을 것이다.
재위 6년에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9년, 고구려 양원왕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나제동맹에 따라 정예병을 파견하여 고구려 군대를 박살내었다.
친정을 시작한 11년에는 동맹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의 10개 군을 얻었다.
이때 백제는 하류의 6개 군을 얻었는데,
내친 김에 평양까지 진격하자는 어찌 보면 타당한 백제의 제의를 거절하고,
고구려와 타협하여 점령한 지역을 영토로 인정받았다.
이는 동맹을 배신하는 행위였으므로, 백제의 항의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뭐에 열 받았는지 이번에는 동맹을 향해 칼을 뽑았다.
나제동맹이 깨지면 매우 곤란해 지는 백제는 별 수 없이 없던 일로하였으나, 기가 찼을 것이다.
이렇게 친정 첫 해를 마무리 한 후, 이듬해에는 고구려를 단독 공격하여 10개군을 취하였다.
이번에는 고구려가 어이없었을 것이다.
얘가 아무래도 사춘기를 순조롭게 보낸 애는 아니었나 보다.
전쟁에 자신감이 붙었는지 14년에는 백제가 확보한 한강 하류 지역을 마저 빼앗아 버렸다.
이로써 신라는 기존 생산기지인 낙동강 유역과 더불어 생산력이 높은 한강 유역을 전부 확보하게 되었고, 덤으로 중국 직통 노선까지 개설하여,
경상도 깡촌의 멋도 모르던 촌놈이, 고구려, 백제에 못지 않는 국제 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업그레드 되었다.
이해에 성왕이 보낸 백제의 왕녀를 후궁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성왕이 무슨 생각으로 이미 적이 된 신라에 결혼 동맹을 제안하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별 성과는 없었는지, 다음해에 관산성에서 크게 한판 붙게 되었다.
이럴려고 위장 결혼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백제로서는 회심의 일격을 가한 것이었겠으나,
황당하게도 성왕이 신라 병사들에게 사로잡혀 목이 잘려버리는 바람에 참패하였고,
결국 백제는 신라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
진흥왕은 성왕의 머리를 왕궁 계단 밑에 묻어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는데,
배신은 지가 먼저 해놓고 왜 그리 성왕을 미워했는지가 의문이고,
믿거나 말거나인 일본서기의 기록이기에 진위 조차 의심스러우나,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이후 신라는 북진하여 영토를 함경도 남부까지 크게 확장하였고,
16년에는 점령한 영토를 직접 순시하며 각지에 순수비를 세웠다.
촌놈이 출세한 꼴이니 자못 흐믓하였을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 4개이다.
18년에 국원을 소경으로 삼았는데, 후일의 중원경으로 현재의 충주이다.
23년에는 백제의 침입을 호되게 혼내주었고,
미실의 연인 사다함을 보내 대가야를 복속시키며 가야들을 한반도에서 지웠다.
가야의 유민 우륵 등을 받아들여 문화 창달에도 힘을 기울였고.
27년에 찌질이 동륜을 왕태자로 삼았고 황룡사를 준공하였다.
33년, 태자 동륜이 아버지의 후궁들과 사통하다 개에 물려죽었는데, 문제의 여인 미실이 이 사건에 깊숙이 관여되어 있었다고 한다.
35년에는 왕후 사도가 대리청정을 하였고, 다음해에는 궁주 미실이 잠시 대리청정 하였다는데,
이는 자식도 죽고, 몸도 않좋고 해서 잠시 쉰 것일 수도 있고, 드센 여인들의 치맛바람에 정신이 혼미해진 것일 수도 있겠다.
37년에는 여자들에게 휘둘리기를 좋아하는 기질 때문…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여자를 두목으로 하는 원화제도를 실시하였는데, 남모와 준정이 질투에, 치정에, 음모에…온갖 난리를 치는 바람에 폐지하고,
새로운 인재 발굴 시스템인 화랑제도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아들 사륜에게 대리 청정하게 한 후 얼마 안 있어 서거하였다. 향년 51세.
연호는 개국, 태창, 홍제 등이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가장 늦게 불교가 전파된 신라에서 불교 사랑이 가장 심하였는데,
이 양반도 불교에 심취하여 자신을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였고, 두 아들의 이름도 불교식으로 지었다.
그런데 백제 성왕도 전륜성왕을 자처했다고 하므로, 결국 신라 전륜성왕이 백제 전륜성왕의 목을 잘라 버린 꼴이었다.
진짜 전륜성왕이 봤다면….기가 막혀 전륜성왕질을 때려치웠을 것이다.
황룡사 등 많은 절을 지었고, 말년에는 법흥왕처럼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고 한다.
불교를 이리 사랑하면서도 색계에는 신경을 쓰질 않아 미실을 비롯한 수많은 후궁들을 거느렸는데,이 후궁들 또한 색계에는 별 관심이 없어, 가뜩이나 복잡한 왕실 족보를 미로로 만들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백제의 근초고왕에 상응하는 신라의 대표 주자이긴 하나,
당시 고구려는 돌궐의 공격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고, 백제는 뒤통수를 맞은 것이었으므로,
위 두 양반에 비해 압도감이 좀 부족하고, 얍삽하다는 느낌까지 들기도 하지만,
어려서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고생을 했고, 말년에는 마누라들의 등쌀에 기를 펴지 못하는,
미로와 같은 가정사 속에서도, 용하게 정신을 잃지 않고 능력을 발휘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하고, 가야 지역을 완전히 병합하였으며, 화랑 제도를 실시하는 등,
후대를 위해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을 보면,
정복군주의 자질면에서는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할 것이다.
명군이었다.
*미실
위서의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만 나오는데,
당대의 실력자들을 모두 치마폭에 가두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정체가 모호한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