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정명, 자는 일소,
나당전쟁이라는 승부수를 통해 삼한 통일을 완수한 문무대왕의 아들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를 정비하여,
8세기 중엽까지 지속되는 신라의 최전성기를 연 세종대왕급의 군주이다.
681년 왕위에 올라, 선왕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귀족세력을 압박하였고,
이에 반발하여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면서,
장인을 포함한 상당수의 귀족들을 반란으로 엮어 숙청하였으며, 왕비까지 내쫒아 버렸다.
고려 광종이나 조선 태종이 롤 모델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반란 진압 후에는,
왕궁경호를 담당하는 시위부에 장군을 6명이나 배치하여 왕권도 강화할 겸 안전을 도모하였다.
짧은 시간 내에 반란을 진압하고 후속조치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으로 보아, 친위 쿠데타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지만,
뭐가 되었든, 이렇게 삼한통일 과정 중에 양산된 각 종 공신 등 비대해진 귀족세력들을 정리하였고,
즉위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으며,
현대에 대학 입학 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에 단골로 출제되는, 국학을 설치하였다.
사실 국학은 진덕여왕기에 처음 설치되었으나,
일반적으로 국학 설치는 유교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겠다는 신호와 같은 것이므로,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강한 왕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진덕여왕은 얼굴마담 같은 왕이었기에 국학 또한 별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명실상부한 국학의 설치 운영은 신문왕이 처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3년차에 새 장가를 갔고,
보덕국 왕 안승에게 김씨 성을 하사하고 경주에 살게 하였으나,
이듬해에 안승의 일족이 반란을 일으카자, 보덕국을 없애버리고 점령지역 전체를 직접 통치하였다.
7년에 태조대왕 (성한왕?, 미추왕?), 진지왕, 김용춘, 무열왕, 문무왕을 모시는 5묘의 제도를 정비해 왕통을 확립하였고. 수조권만을 행사할 수 있는 문무 관료전을 최초로 지급하였으며,
2년 뒤, 노동력 징발이 가능한 녹읍을 폐지하는 엄청난 일을 하였다.
692년 재위 12년 만에 6살짜리 효소왕을 남겨두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아쉬움을 남겼다.
신문왕은 반란을 빌미로 귀족들의 힘을 꺾은 후,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의 제도를 정비하여,
군제인 9서당의 틀을 만들었고, 5단계 관직제도를 완성시켰으며, 9주 5소경의 지방제도를 확립하였다.
국학을 설치하여 유교이념을 도입하였고
녹읍을 폐지하여, 진골 귀족들도 일반 관료처럼 월급을 받는 월급쟁이로 만들었다.
도읍을 대구로 옮기려고도 했었다는데, 비록 반대가 극심하여 성사시키지는 못했으나,
이 또한 국가의 틀을 바꾸어 왕권을 강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당전쟁 이후 처음으로 당과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는데,
무열왕의 묘호, 태종이 이세민의 묘호와 같아 불경이니 바꾸라는 당의 요구가 있자,
이를 완곡히 거부하여, 나름의 자존심도 챙겼다.
창업보다 어렵다는 수성을 훌륭히 수행하여,
문무대왕과 함께, 후대가 감사할 만한 업적을 많이 남긴 명군이었다.
용이 되어 동해바다에서 물고기를 주식으로 하며 살던 문무대왕이,
아들이 벌려놓은 일이 많아 걱정이 되었는지 느닷없이 현신하여,
불기만 하면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는 만렙 만파식적을 주고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으며,
한국 최초의 창작 설화라고 하는 화왕 설화를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에게 듣고,
크게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