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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column신라 : 40대 애장왕, 안타까운 최후

신라 : 40대 애장왕, 안타까운 최후

김 청명, 소성왕의 아들로 서기 800년 13세에 즉위하였다.
너무 어린 나이였으므로 숙부 언승이 섭정하였고,
원성왕계의 왕통을 확립하기 위한 언승의 의도였겠지만,
즉위 이듬해에 무열왕과 문무왕은 따로 분리시키고, 태조부터 애장왕의 고조까지 모시는 오묘를 새로이 구성하였다.
아무튼 이로서 편법적이지만 황제국을 의미하는 7묘가 완비되었다.

3년 차에 신궁에 제사지내었고 가야산 해인사를 창건하였다.
5년에 알천 가에서 열병하며 친정을 준비하였고,
6년, 친정을 시작하여 공식 20여조를 반포하는 등 율령체제를 확고히 하였다.
이때 관제 개혁도 같이 시행하였다 하는데, 18살 청년 군주의 의욕적인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7년에 사찰 창건과 불사에 대한 금령을 제정하여, 
그 동안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폐단이 심해지던  불교계에도 경종을 울렸다.
자신의 지지 세력일 지라도 불의를 용납하지 않는 순수함이 느껴진다.
8년에 무열왕계인 김헌창을 시중으로 삼아 호랑이 같은 숙부들을 견제하는 패기만만한 모습을 보였고,
9년에는 내친 김에 지방행정구역도 개편하여,
군, 읍의 경계를 나누어 정하는 등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갓 스물 넘은 청년 군주의 의욕적인 정치가, 
그 동안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숙부들을 자극하였는지, 809년, 동생과 함께 제거 되었다.
재위는 10년, 22살 나던 해 7월이었다.

묘호에 슬플 애자가 들어가 그저 불쌍하기만 한 인생을 산 것 같으나,
나름 패기만만하고 의욕적인 청년 군주였다.
다만 순수함과 패기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원성왕의 독특한 왕권강화책으로 어린 나이부터 국가 요직을 경험한,
노회한 숙부들이 너무 벅찬 상대였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세상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부족하고,
자기 세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소년왕이 처음부터 전제 군주의 위엄을 갖추기는 무리였을 것이므로, 
애장왕의 의욕에 찬 왕노릇은,
그 동안 정권을 담당해 왔던 호랑이 같은 숙부들 눈에는 가소로운 철부지의 객기 정도로 비치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갖잖아도 왕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파멸적인 잠재적 위험 때문에 인내는 길지 않았고, 결국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의 도전은 숙부들의 한 방에 무너져 슬플 애자를 얻고 말았다.
소성왕이 몇 년 만이라도 더 살아,
이 싱싱한 젊은이가 숙부의 섭정를 받지 않고,
바로 친정을 하여 개혁을 완수하였더라면 어쩌면 명군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풀만 무성하여 더욱 슬픈 애장왕, 애잔하지 않을 수 없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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