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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column고려 : 13대 선종, 평온무사

고려 : 13대 선종, 평온무사

왕 운
30년 가까이 태자로만 재직하던 형이 즉위한지 3개월 여만에 사망하여 얼떨결에 왕위에 올랐다.
1083년 35세였다.

이 시기는 국제적으로 큰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시절이었고, 공연히 사람을 몰아세우는 형이상학도 미미한 상황이라,
다들 생업에 몰두하였고 국제 교역 또한 활성화되었는데,
고려는 거란, 송, 여진 등 전통적인 교역국 외에도 일본까지 포함하는 더 넓어진 시장을 주도하였다.
동 시대를 살다간 송의 대표적인 시인 소동파는 5가지 손해를 들어 고려와의 교역을 반대하였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고려가 친송 일변도의 외교를 한 것이 아니라, 거란과 등거리 외교를 하며 실리를 챙기는 바람에,
송의 재정에 지장을 줄 정도로 무역 역조가 심하여, 불만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거란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했던 송은, 거란 배후의 강국 고려의 역할이 절실하였기에,
불리한 관행을 끝내 바꾸지 못하였고,
거란 또한 영토적 야심을 포기하고,
압록강에 시장을 설치하여 교역의 주도권이나마 쥐려고 하였으나, 고려의 반대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배상금까지 물어야 했다.
당시에 고려를 방문한 송이나 거란의 사신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대국의 사신으로서의 위엄이나 허세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과분한 대접 또한 없었으며, 
실수하면 망신당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고려가 탄탄한 국력을 기반으로, 송과 거란의 전통적인 갈등관계를 이용하였으며,
동북아의 균형자로서 확실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삼대를 이어가며 줄줄이 명군이 출현한 고려에서 특별한 문제라고는 기상 이변 정도였으므로,
문물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노릇이었을 터인데,
이 평온의 시대에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한 사람은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의천은 문종의 네째 아들로서 11살에 승려가 되기로 자원하여,
불심이 돈독했고 그 불심을 왕권강화에도 이용했던 차원 높은 책략가, 아버지를 기쁘게 하였는데,
그의 은사는 김은부의 아들인 외삼촌 경덕국사 난원이었다.
승속 양쪽 모두의 로얄 패밀리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의천은 아버지의 기대를 듬뿍 받으며,
불과 13살의 나이에 승통이 되어 교종 최고의 지위에 올랐는데,
그는 이에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경·율·론 삼장은 물론, 유교의 전적과 역사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섭렵하였으며,
불교의 각종 계파와 신라시대의 선교양종까지 두루 연구하여 불교학 연구의 대가가 되었고,
외전인 육경과 칠략 등을 해석하기도 하였다.
명실공히 당대 최고 지식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렇게 기특하고 믿음직한 아들을 둔 문종은 사상 최대의 절 흥왕사를 신축하는 등 자신의 의도를 구체화하였는데,
이에 따라 의천은 권력과 지식이라는 인간사 최강의 양대 무기를 한 손에 거머쥐게 되었고, 
그 명성이 사해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이에 거란 도종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의천을 초청하여 강론을 듣고 계를 받아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이는 도종의 불심이 깊고, 대덕을 보는 혜안이 뛰어나 그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천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거란 황제의 깊은 속이야 알 길이 없지만,
정치인의 행동에서 정치적 의미를 배제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은 이야기이므로,
이는 당시 고려와 거란과의 관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겠다.

의천은 자타공인의 지식인이자 대덕의 명성을 누리고 있었으나, 변방이라는 한반도의 질긴 열등의식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는지,
역사상 언제나 선진국인 중국으로의 유학을 희망하였는데,
당시의 복잡한 국제 정세와 국내에서의 막중한 자신의 역할 때문에 꿈을 이루지 못하다가,
자신의 열렬한 후원자이자 강력한 족쇄였던 아버지와 큰형이 사망하자, 달랑 종자 하나만을 데리고
송으로 떠나는 배에 몸을 실었다.
이는 순수한 구도의 길을 가는 중으로서는 남다를 것이 별로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는 중 이전에 왕자였고 이즈음에는 국제적 비중이 매우 높은 인물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밀항은 당시의 동북아를 발칵 뒤집어 놓는 일대 사건이 되었을 것이고,
줄초상을 치르고 예정에도 없던 왕이 되어 정신이 하나도 없던 선종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던 동생이 도를 닦기 위해 송으로 밀항하였다는 소식은 아마도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것이다.
선종은 급히 수행단을 꾸려 송으로 파견하였는데,
당시 고려는 거란의 압력에 의해 송과 공식적인 관계를 단절한 상태였으므로,
외교적으로 매우 복잡하였을 것이다.
고려왕의 사랑하는 동생이자 고려 불교계를 대표하는 의천이, 밀항으로 유학을 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송의 조정은 발칵 뒤집혔을 것이나,
송에 득이 되었으면 되었지 손해 볼 일은 아니었으므로, 송철종은 관리를 보내어 수행 인도하게 하였고, 친히 접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승 대덕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등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덕분에 대표적 반한파였던 소동파도 의천을 수행해야 했다고 한다.
이렇게 의천은 천자의 관심 속에,
시인 소동파의 자존심을 난도질하며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지식욕을 채워가고 있었으나,
주지가 비어있는,
마음의 의지처이자 왕실의 울타리인 흥왕사를 바라봐야했던 작은 형의 인내는 그리 길지 않아,
의천은 2년여의 유학생활로 만족해야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사이 의천은 천재답게 교,선 양종 통합의 수단으로 천태종을 재발견하고, 그 이론에 통달하였으며, 
흥왕사로 복귀한 후,
이를 강론하며 교종과 선종의 통합에 박차를 가하여, 유학을 후원했던 작은형을 흐뭇하게 하였다.

천태종은 중국 수나라 때 탄생한 불교의 한 종파로서 삼국시대부터 수차례 한반도에 전해졌었고,
광종도 천태종을 통해 불교의 통합을 시도했었다는 것으로 보아,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는 요소를 담뿍 가지고 있는 듯하나,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이 분파는 쉬워도 통합은 어려운 법인지라, 그저 이상에만 머물러 있었는데,
의천은 그가 지닌 권력과 지식으로 강제적이고 일시적이긴 하나 통합에 근접하였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천태종으로 선종을 탄압하면서 절을 짓는 한편 열심히 경전을 찍어내었고,
일명 속장경인 교장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선종은 아버지처럼, 불교를 친위 세력화하여 왕권의 기반으로 삼는 한편,
국학에 공자의 제자인 72현의 벽화를 그리게 하고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게 하는 등,
유교의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 유교와 불교의 조화로운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고 1094년 병을 얻어 향년 46세로 사망하였다.

통치기간의 최대 이슈는 의천의 밀항사건이 아닐까 할 정도로, 평온무사한 11년간의 통치였다.
영토의 확장도 없었고 눈에 띠는 제도의 개혁조차 없어,
마치 문종기가 그대로 연장 된 듯한, 밋밋하고, 진취적인 맛이 없는 시대였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창업보다 수성이 더 어렵다는 말처럼 번영을 그대로 계승 유지 발전시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성들에게 예측 가능한 삶을 제공하여 생업에 몰두할 수 있게 한 선종, 훌륭한 정치가였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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