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 욱
어려서부터 영특했다던 그는 안타깝게도 소아 당뇨병 환자였다.
*소아 당뇨병,
말 그대로 어린 나이에 발병하는 당뇨병인데,
당뇨병은 일종의 호르몬인 인슐린의 생산 또는 작용에 문제가 생겨 혈당이 조절되지 못하는 질환으로, 생산이 문제인 제 1형과 인슐린에 대한 세포의 반응에 문제가 생기는 제 2형으로 나뉜다.
제 1형은 인슐린의 생산이 안 되는 것이므로,
인슐린만 적절히 투입해주면 사는데 지장이 없어 인슐린 의존성 당뇨병이라고도 하는데,
소아 당뇨병의 대부분은 인슐린 의존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헌종은 제 1형 당뇨병 환자였을 가능이 높은데,
유일한 치료제인 인슐린이 나타나기까지는 아직도 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필요했다는 것이 비극이었다.
병의 기전조차 알 도리가 없던 당시 의학 수준으로는 제 아무리 명의라 하더라도,
풀뿌리나 달여 먹이고,
가끔 침으로 온몸을 벌집으로 만드는 치료인지 고문인지 모르는 짓을 아픈 애에게 자행하였을 것이고, 도사라도 만나면, 수은을 먹여 중금속 중독을 추가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뭔 짓을 했건 당뇨 합병증은 빈천을 구별하지 않으므로,
헌종은 병약한 유, 소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는데,
11살이 되던 1094년, 나라를 무사태평하게 이끌어 오던 아버지가 서거하였다.
제 한 몸 추스르기도 힘겨운 어린 소년이 고려의 지존위에 올라 동북아 균형자가 되었는데,
나이로 보나 몸 상태로 보나 정상적인 왕 노릇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어머니 사숙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인주(경원) 이씨 사숙태후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의 권력욕 때문이었는 지는 모르겠으나,
섭정의 직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국정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당시 인주 이씨 좌장 이자의와 마찰을 빚었는지,
아니면 이자의가 헌종의 숙부인 계림공 왕 희를 견제하기 위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자의는 병약한 헌종을 대신하여 자신이 누이동생이기도 한 선종의 3비 원신궁주의 소생 한산후
왕윤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외척 인주 이씨 가문의 안전과 세력의 공고화만을 위한 계획이었으므로,
이전부터 야심충만했던 계림공의 입장에서 보면,
왕이 될 기회가 물 건너가게 됨을 의미함과 동시에,
지고무상한 옥좌의 주인이 외척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주객이 전도된 고려의 기막힌 현실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므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두 세력 간의 충돌은 필연이 되었는데,
왕실과 외척세력을 각각 대표하는 두 거인의 싸움은 조정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이 난장판에서 정치 초년생인 섭정 태후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저 병약한 아들을 둔 불쌍한 과부에 불과한 신세가 되고만 사숙태후는
이자의가 자객의 손에 살해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두 손을 들어 버렸다.
무사태평한 세월을 보냈던 선종은 설마 이러한 상황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나,
무심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자기의 관성대로 굴러 계림공의 손을 들어주었고,
고려의 조야는 모두 승자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립무원이 된 12살짜리 소아 당뇨 환자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양위가 유일하였고.
1095년 왕위에서 물러나 2년 여를 더 살다 14살에 병사하였다. 재위는 1년.
왕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아이였는데,
어른들 욕심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마음고생만 하다가 명을 단축한듯하여 안쓰럽다.
그 동안 부자상속보다는 형제상속이 더 잦았던 고려에서,
나름 명군 소리를 듣던 선종이 왜 이러한 무리수를 두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