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도 아닌 왕이 태조라는 묘호 비슷한 시호를 받았고 거기에 대왕이다.
처음부터 심상치가 않은데 기록을 보면 더 어이가 없다.
7세에 왕위에 올라 99세에 동생에게 선위하였고, 상왕으로 9년을 더 살다가 118세에 사망했다고 한다. 재위기간만 93년으로 세계 최장 기록인데,
다 믿기는 어렵다.
휘는 고 궁, 모본왕의 사촌 동생이다.
모본왕이 칼 맞고 죽은 후, 원래는 아버지 재사가 다음 왕으로 추천을 받았는데,
재사가 자기는 나이가 많다고 고사하고 자기 아들을 대신 추천하였다고 한다.
재사는 유리명왕의 막내아들이므로,
당시는 유리왕 사후 38년이 지난 시점이고 대무신왕이 서기 4년에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나이가 많아야 40대 중반이었을 것이다.
중년이라는 이야기인데,
중년이 나이가 많아 왕위를 고사하고 코흘리개를 왕으로 삼는다?
그리고 유리왕의 손자라면 해씨일 텐데 태조왕은 왜 고씨일까?
이해불가가 아닐 수 없다.
동명성왕과 유리명왕이 이주세력이 확실하다면,
초창기 고구려에서 이 두 세력을 중심으로 토착세력인 소노부와 계루부의 주도권 쟁탈전이 마치 드라마처럼 치열하게 펼쳐졌을 것이고,
엎치락 뒤치락 하였겠지만 결국 계루부의 승리로 귀결되어, 이때부터 제대로 된 고구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얼개는 짜이지만,
워낙 오래전의 일이므로 입증할 수는 없다.
태조왕은 그저 신비로울 정도로 오래 살면서 조폭 수준의 부족국가를 왕권 중심의 고대국가로 나아가게 만든 대단한 임금 정도로만 기억해도 무방할 것이다.
태조왕은 어려서 매우 총명하였는데, 특이하게도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고 한다.
석가모니 보다는 못하지만, 아무튼 이적인데…그러려니 하자.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초기에는 모후가 섭정을 하였고,
장성 한 이후에는 정복국가 고구려의 실질적 시조답게 주변 국가들을 약탈하고 병탄하기 시작하였다.
55년 요서 지역에 10개 성을 쌓아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였고
56년에는 동옥저를 병합하여 동으로는 창해, 남으로는 살수에 이르렀다.
68년에 갈사국을, 70년에는 조나를, 72년에는 주나를 병합하였고
105년에는 요동군을 약탈하였으며,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과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121년 봄에는 후한이 예맥을 공격하여 동생인 수성을 보내 막았고,
나이가 많아 힘들었는지 수성에게 국정을 돌보도록 하였다.
음력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수현을 공격하여 요동태수 채풍을 살해하였다.
음력 12월에는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부여가 방해하여 크게 패하였다.
122년에도 마한, 예맥과 함께 현도성을 쳤으나 부여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런데 왜 마한이고 예맥일까? 현도성이 살수 남쪽에 있었단 말인가?
146년에 요동의 신안과 거향을 약탈하고, 서안평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였으며,
낙랑태수의 처자를 생포하였다. 이때가 99세,
도대체 죽을 생각을 안 하는 형보다 먼저 늙어죽을 것을 염려한 동생이 난리를 치는 바람에,
상왕으로 물러나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 165년 서거하였다.
향년 118세.
워낙 오래 재위하였고 업적이 많아, 한 사람이 아니라는 설, 후대에 조작으로 기간을 늘렸다는 설 등
별의 별 설이 난무하지만, 뭐가 되었건 강력해진 무력을 바탕으로 후한의 변경요새들을 본격적으로
두들기기 시작한 임금이었다.
비록 약탈하고 화친하고를 반복하는 전형적인 흉노 짓이었지만, 이 짓도 강해야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중국 놈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강국의 기초를 놓은 명군이었다.
태조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백제 고이왕, 신라 내물왕과 함께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은 왕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