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전쟁 이후에 당나라는 내부 정치 투쟁 등의 이유로 준동하지 않았고
신라도 백제부흥군에게 골머리를 앓느라 한동안 잠잠하였는데,
그 잠깐의 휴식기에 연개소문이 사망하였다.
연개소문은 고구려 대귀족 중의 하나인 연씨 가문의 수장으로, 영류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잡은 인물이었다.
사정이야 어떻든 역적질임에는 분명하였으므로 이는 당 침공의 명분이 되었고,
비록 다 막아내었다고는 하나, 나라의 기간 산업이 초토화되고 온 나라가 거덜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수장인 연개소문에 대한 불만을 불렀을 것이고,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격인 연개소문은 독재자가 되어 철권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민심 이반으로 이어졌으며, 지배층의 균열을 가속화시켰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생전에는 그의 카리스마와 급박한 전황 때문에 그럭저럭 누르며 끌고 갔을 것이나,
죽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다.
연개소문의 뒤는 장남 연남생이 이었는데,
당시 고구려의 사정은 찌질이 남생이의 지도력으로는 통제가 어려운 지경이었고,
설상가상으로 두 동생 남건과 남산이가 반란을 일으켰다.
찌질한 형놈도 문제이지만, 나라가 풍전등화인 상황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이놈들도 참으로 미련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조정과 백성들은 당연히 동요하였는데,
동생들에게 쫓겨나 구세력의 온상인 국내성으로 피신한 연남생은 당에 구원을 요청하는 염병할 짓을 하였다.
남생이 이 찌질이와 이 넘을 부추긴 국내성 세력,
장수왕 대부터 이어진 고질적인 신구 세력 간 암투의 결정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고구려에 치명타가 되었다.
이 꼴을 본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서 살 길을 구했는데,
가려면 저 혼자 갈 일이지 남부의 12개 성을 들고 튀었다.
연정토 이놈은 신라에서 대접 받으며 잘 살다가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귀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고구려 정벌을 거의 단념하고 있던 당 고종은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달려들었는데,
남생의 배신은 요동 방어선을 무의미하게 만들었고,
666년. 이 세적이 이끄는 당의 주력부대가 참전하면서 고구려의 운명은 절망적이 되었다.
667년 필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10월 신성이 함락되고 부근의 16성이 함께 당에 항복했다.
남건의 분투는 설인귀에게 5만의 병사가 도륙 나는 것으로 좌절되었고,
요동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남건이 압록강 방어선에서 당군을 저지하는 동안 안시성군 3만이 당군을 기습했으나 실패했고.
668년 2월 이세적과 설인귀가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부여주 모두가 당에 항복했다.
그 끈질겼던 고구려에 항복이 만발한 것이다.
남건은 부여 성 탈환을 위해 5만 병력을 보내 이세적과 설하수에서 교전했으나
3만 이상의 병력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으며,
압록강 방어선마저 돌파한 당군은 평양성을 포위했고,
한 달 남짓 포위가 이어지자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당군에게 항복했다.
싸우기만 하면 지는 주제에 남건이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으나,
이적과 내통한 남건의 심복 신성이 성문을 열면서 무릎을 꿇었다.
10월에 보장왕과 남건·남산 형제 등 20여만 명이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위대한 고구려의 700년 역사가 막을 내렸다.
나라를 배신한 형 남생이와, 상황 파악도 못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말아먹은 동생 남건이,
어떤 놈이 더 빌어먹을 놈일까? 난형난제가 아닐 수 없다.
위대한 고구려는 비록 이렇게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나라를 말아먹는 것으로 끝이 났으나,
그들이 지배했던 영역은 그 이후 발해로 이어졌다.
발해의 멸망 후 만주가 우리 민족의 무대가 된 적은 없으나,
만주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영토로 존재해 왔고, 존재할 것이다.
고구려나 발해의 구성 종족, 이런 걸로 그다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고구려의 후예가 꼭 하나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