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대 고이왕
출신이 가장 불확실한 양반으로, 온조계의 방계 또는 비류계라는 설이 있고,
심지어는 소서노의 전 남편인 우태라는 믿기 힘든 설도 있다.
무려 53년간 재위했다 하는데, 이것도 믿기 힘들고.
대륙백제도 건설했다는 설도 있는데, 이건 더 믿기 힘들고.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신라의 내물왕, 고구려의 태조왕과 함께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은 실질적 시조라 불리고,
사실적 기록이 나타나는 것도 이 시기 부터이다.
고이왕 이전의 백제는 국가라기보다는 정착할 땅을 찾아 헤매는 무장 집단의 성격이 강하였으므로,
초기에는 용병집단 비슷하게 마한의 울타리 노릇을 하며 말갈족과 대치하였으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차차 체제를 갖추어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이왕 이전에 왕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이 있었는지는 의문인데,
아마도 나중에 나라의 꼴을 갖추고 역사를 기록할 때, 체면상,
온갖 윤색과 조작을 가미하여, 무용담이 전승으로 내려오는 행동대장급의 인물이나,
대두목 급의 인물을 왕으로 기록하였을 것이다.
비정상적으로 긴 재위기간 또한 대충 꿰어 맞춘 결과일 것이고.
뭐가 되었건 고이왕 때부터 한 세력의 독주와 권력의 집중이 나타났으며, 법령 또한 반포되어,
힘을 우선시하던 이전의 원시적 상태에서 발전하여 제도의 통치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수장의 권력 강화는 6좌평,16품계 등 관직의 정비 및 위계의 확립으로 나타났고,
고대 왕권 체제로 이어져, 국가 시스템의 효율성을 증대시켰다.
덕분에 목지국을 누르고 마한의 실질적인 맹주가 되었으며,
남옥저의 일부를 점령하는 등 영토도 확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때 중국의 서진과 외교관계를 맺었는데, 변방의 야인 취급이었겠지만,
아무튼 국제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았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지역에서는 나름 힘을 쓰게 되었는지라, 동예와 우호관계를 조성하기도 했고,
한사군의 후신인 낙랑, 대방과도 혼인을 통한 동맹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였다.
신라와는 자주 충돌하였다고 하는데,
이 당시 신라나 백제가 변경에서 힘겨루기를 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나,
그렇다고 한다.
고이왕은 무예가 뛰어나고 호방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기록만 보면 수양대군의 대선배처럼 보이나, 조선과 당시의 백제는 상황이 전혀 다르고,
친삼촌도 아닌 듯하므로 유교적 도덕률을 따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태백성, 혜성 등 천문의 기록은 왕 노릇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유교적 명분론 때문은 아니고, 초기 국가의 일상적인 권력투쟁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