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대 선덕왕
김양상, 내물 마립간의 10세손이며, 미실의 연인, 사다함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성덕왕의 딸인 사소부인으로. 혜공왕의 고모가 된다.
선덕여왕과 시호가 같아 혼동할 수 있으나 한자가 다른데, 당시에도 발음이 비슷하여 문제가 되었는지,
삼국시대 여자 선덕왕을 선덕여왕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말년에 정계에 두각을 나타낸 후 만월부인의 섭정 치하에서 승승장구하였으며,
혜공왕 10년(774년) 상대등에 올랐고, 귀족세력의 대표가 되었다.
전제 왕권을 복원하려는 혜공왕과 대립하였고, 왕당파 김지정의 난을 김경신과 함께 진압하였는데,
그 와중에 혜공왕이 피살되자 혁명 동지 김 경신의 후원을 받아 왕위에 올랐다.
780년의 일이었다.
즉위 후 김경신을 상대등으로 삼아 혁명정부를 구성하였고,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지내었으며 패강진을 개척하였다.
패강진은 대동강 이남의 평안도 지역으로,
당시까지도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을 손에 넣어 배후 세력화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신라는 삼한통일 이후 무려 100년 만에 이 지역의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어찌되었건 영토 확장의 업적은 남긴 셈이다.
하지만 곧 병이 들었고 혁명 동지 김경신에게 양위하려 하였으나,
무열왕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는지 무산되었다.
이듬해인 785년, 당의 책봉을 받았으나 병이 더욱 깊어져 사망하였고, 화장하여 동해에 뿌려졌다.
재위 기간은 5년, 고작 이정도 영화를 바라고 사촌에게 그 몹쓸 짓을 했나 싶기도 하지만 권력의 속성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랴.
전 왕들과는 다르게 당의 책봉이 상당히 늦었고,
그 전까지 심했던 일본과의 갈등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약간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데,
역사상 신라는 일본과 가까워 교류가 많았고 연오랑 세오녀 설화에서 보이는 것처럼 정치적인 관계도 밀접했다.
따라서 원래 신라는 친일파 내지 지일파가 주류였는데,
삼국대립이 격화되면서 일본은 백제에 올인하였고, 당은 신라를 전폭적으로 지원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무열앙을 대표로 하는 친중파가 세력을 얻었을 것이다.
국가 위기상황이었으므로, 친일파라 해도 이에 대해 별 불만이 없었을 것이나,
상황이 바뀌어 주적이 중국인 나당전쟁을 치르게 되자,
다시 배후에 위치한 일본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을 것이고, 친일파들의 역할 또한 증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당전쟁 이후,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친중파가 득세하여 일본 무시전략으로 일관하자,
그동안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했던 친일파들은 입장이 곤란해졌을 것이고.
이에 대한 반발 및 갈등이 혜공왕기의 수많은 반란들로 표면화된 것은 아닐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선덕왕의 쿠데타는 친일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아닐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