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자비, 불교 냄새가 물씬 나는 이름이지만, 불교와는 별 관계없는 인생을 살았다.
눌지왕의 장자이자 실성왕의 외손자로서,
독립운동파였던 아버지의 세력과,
괴뢰정권이었던 외할아버지의 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신분이었으므로,
국론의 통일과 내부의 단결이 절실했을 당시의 사정상,
신라왕으로 이 양반 만큼 어울리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신라 왕가 특유의 사위상속의 전통도 부자상속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었다.
458년 즉위하였고,
이듬해에 100척의 배를 끌고 온 대규모의 왜구와 싸웠는데,
서라벌이 포위되는 불리한 싸움이었으나 어찌 어찌 물리칠 수 있었다.
4년에 사촌 누이와 결혼하여 족벌을 강화하였고,
5년, 6년 연속하여 왜구가 침입하였으나 장군 덕지 등이 활약하여 물리쳤으며.
10년에는 전함을 수리하였다 .
11년에 고구려와 말갈이 실직성을 습격하였으나, 물리친 후 강릉에 성을 쌓았고.
12년에 서라벌의 구획을 나누고 방리의 이름을 정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였다.
13년에는 충북 보은에 있는 그 유명한 삼년산성을 쌓았고.
14년에 모로성을 쌓았고,16년에는 명활성을 수리했으며 ,
17년에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이 해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입해 나제동맹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이미 한성이 함락되고 개루왕도 죽은 뒤였다 .
19년에도 왜구가 쳐들어왔으나 또 장군 덕지가 물리쳤다 .
20년에도 왜구의 침입이 있었고.
479년 서거하여 21년간의 재위를 마쳤다.
평생 전쟁하며, 성만 쌓다 볼 일 다 본 것 같지만,
이 시기에 쌓은 성들 덕분에 이후 이어지는 고구려 및 말갈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었고,
진흥왕기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되찾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평생 노심초사한 자비왕,
그가 없었다면, 신라는 삼국통일은 고사하고 삼국 중 가장 먼저 망했을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