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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column신라 : 42대 흥덕왕, 장보고 등장하다

신라 : 42대 흥덕왕, 장보고 등장하다

김 수종 (경휘), 김인겸의 삼남으로, 큰 형 소성왕의 동생이자 사위가 된다.
작은 형 헌덕왕과 함께 조카이자 처남인 애장왕을 죽였고,
이찬, 상대등을 거쳐 부군(부왕)에 책봉 되었다.

826년 헌덕왕이 사망하자 조카들이 있었는 데도 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무서운 숙부였나 보다.
그런데 즉위 2달 만에 조카이자 아내인 장화부인이 사망하였다.
조카들 킬러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아내는 사랑하였는지, 크게 슬퍼하였고,
후궁이 있었는데도 이후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 후사를 보지 못하였다 한다.
왕비가 남동생을 죽인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듬해에 신궁에 제사 지내었고 당의 책봉을 받았으나,
헌덕왕을 괴롭혔던 자연재해는 왕이 바뀌었다고 봐주지 않아, 큰 가뭄이 들었다.
3년에는 민족의 영웅 장보고에게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게 하는 혜안을 보였으며,
빨리 부자가 되게 해준다며 혹세무민하는 요사스러운 놈을 먼 섬에 귀양 보내었다.
그리고 당에서 차의 씨앗을 수입하여 지리산 자락에 심게 하였다.
확실히 흥덕왕은 형보다는 나은 인물이었다.

7년에는 봄,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어 왕이 정전을 피하고 음식도 줄이는 등 근신하였으며, 기우제를 지내었다.
그러자 하늘도 그 정성에 감복하였는지 비를 내려 주었는데,
안 되려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이놈의 비가 와도, 주책맞게 너무 오는 바람에 홍수가 났고, 농사는 결국 흉작이 되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도적이 되어 살길을 구할 수밖에 없었고.
8년에도 큰 기근이 들어 각지에 사자를 파견하여 곡식과 베를 하사하며 백성들을 위무하였다.
이래 저래 많이 힘들었는지 시조묘를 배알하기도 하였으나, 역병까지 덮쳐 속수무책이 되었다.
그래도 왕권강화에는 힘을 기울여 9년에는 김우징을 시중으로 삼았고, 군대를 사열하였으며, 남쪽을 순행하며 물품을 하사하였다.
10년에 막내 숙부 예양의 아들인 김균정을 상대등으로 삼았고,
동생 충공의 아들 김명을 시중으로 삼아 신라 후대의 피비린내 나는 왕위 쟁탈전의 씨를 뿌렸다.
836년, 재위 11년째에 사망하여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향년 60세

형 헌덕왕이 망쳐 놓은 나라를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그러나 연속되는 자연재해에는 속수무책이었고,
민생을 돌보기 위해 내놓은 대책이란 것들도,
의식주나 생활용품을 골품에 따라 규제하겠다는 따위의, 근본적인 해결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다.
죽은 아내에 대한 순애보로 후사를 남기지 않아,
신라 하대의 고질인 왕족 간 왕위 쟁탈전에 기름을 부은 것 또한 실책이라면 실책일 것이다.
그래도 근신할 줄도 알았고, 나라 안를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위무하는 등 기본 자질은 갖춘 왕이었다.
장보고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중계무역을 활성화 하였고,
지리산을 차 재배 단지로 만들어, 차 문화 확산에 기여하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증하였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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