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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column고구려 : 19대 광개토대왕, 한국의 알렉산더

고구려 : 19대 광개토대왕, 한국의 알렉산더

서기 391년, 우리 민족 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 군주가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성함은 고 담덕,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대왕의 치세는 당대의 한반도 패권국이자 살조의 원수인 백제에 대한 복수로 시작되었다.

즉위한 지 석달도 안되어 4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제를 쳤고,
삽시간에 석현성 등 10여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이때의 백제왕은 진사왕으로,
나름 능력있는 왕이었으나 고구려의 기세에 눌려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였다.
이후 백제가 실지 회복을 위해 변경을 침략하자 장수를 보내 막는 한편,
거란을 정벌하여 소수림왕 때 잡혀갔던 1만 여 명의 백성들을 되찾았으며,
백제의 요충지 관미성을 빼앗아 두 개의 전선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의 진사왕은 암살을 당하였고 아신왕이 즉위하였는데,
쿠데타의 명분이기도 하였을 것이므로 아신왕은 고구려에 집착하여 매년 공격하였으나,
대왕의 고구려는 끄덕도 하지 않았고,
염수로 진출하여 거란의 일파로 추정되는 패려의 6~700 영(단위)을 쳐부수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이듬해 백제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아리수 이북의 58개 성, 700여 개 촌락을 점령하고 위례성을 포위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았다.
이번에도 두 개의 전선에서 모두 완승한 것이다.
백제의 항복을 받은 후에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북 국경 지대를 안정시켰다.

항복까지 했으면서도 근성의 아신왕은 여전히 전의를 불태워, 
왜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적대하였는데,
백제의 외교가 결실을 맺어 왜가 신라를 공격하였으나,
5만 대군을 파견하여 왜군을 박살내며 신라를 구원하였고,
신라왕을 내물왕에서 실성왕으로 교체하면서 신라를 보호국으로 삼았다.
고구려 주력군이 신라에서 왜군을 격퇴하고 있을 때,
후연이 침입하여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시키고 700여 리의 땅을 탈취하면서,
후연과의 8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신라쪽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후연에 보복전을 펼쳐 숙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404년에는 대방 지역으로 쳐들어 온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궤멸시켰으며,
바로 이어 후연을 치고 연군까지 공격하였다.
보복을 위해 쳐들어온 후연군을 요동성, 목저성 등에서 격파하여 요동 장악을 확고히 하였고.
이듬해에는 5만 군대를 동원하여 후연 군대를 격파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으며,
돌아오는 길에 6개 성을 점령하였다.

고구려와 8년 동안 끊임 없이 치고 받던 후연이 풍발의 쿠데타로 멸망하고,
후연 황실에 양자로 있던 고구려계 모용운이 북연을 건국하자,
모용운의 고씨로의 복귀를 허락하고 고구려 우위의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쪽 국경을 안정시켰다.
410년에는 그동안 세력을 키운, 마지막 남은 두통거리 동부여를 공격하여 굴복시키면서,
동서남북의 모든 적을 굴복시키고
412년 재위 22년 만에 39세를 일기로 서거하여 국강상에 묻혔다.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 (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연호는 영락이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멸망 후 한동안 잊혀져 있었으나,
근대 이후 우리 민족이 외세에 시달리다 주권까지 잃게 되었을 때,
만주에서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면서 그 업적이 재조명되었다.
비에 새겨진 기록은 삼국사기 등의 사서의 기록과 서로 보완하며 많은 것을 알려주었고,
자존심에 상처 받은 식민 상태의 우리 민족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대왕에 대한 평가는 서로 상반되어,
한 쪽에서는 민족혼의 상징으로서 거의 신격화 되어 마치 알렉산더처럼 취급되는가 하면,
다른 쪽에서는 중국이 분열되어 있던 시기에 만주에서 떵떵거리던 운 좋은 싸움꾼처럼 폄훼하기도
하는데,
어느 입장을 취하든 광개토대왕이 우리 민족 사상 드물게 화려한 전공을 쌓은 최고의 정복군주인
것만은 부인하기 힘들다.

화려한 외정에 비해 내정에 대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빈약한데,
광개토왕릉비에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는 기록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22년간 동서남북으로 치달리며 끊임없이 전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배부르고 등 따순 세월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 한 번만 치러도 나라가 휘청거리는 경우가 태반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었을까?

대왕은 약 5만 정도의 전문 전투 집단을 운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주로 전쟁을 전담하였고 또 매번 이겼기 때문에 막대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백성들은 가만히 앉아서 전쟁특수만 누리면 되었고.
따라서 재위기간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았어도 그 흔한 반란 한 번 없을 정도로 정국이 안정되었으며, 
백성들의 지지까지 받는 아주 이상적인 군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대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 고구려는 고국원왕 때의 빈사 상태에서 막 벗어난 시기로,
선왕 고국양왕의 치세에서 알 수 있듯이,
남쪽에서는 전성기를 구가하는 백제에 힘으로 밀리고, 서쪽은 후연의 준동에 전전긍긍하였으며, 
북쪽은 거란이 수시로 침입하여 약탈을 하였고,
숙신과 동부여가 이탈 움직임을 보이는 등 그야 말로 사면초가의 상태였다.
사방이 뺑 돌아 목을 조여 오는 상황에서 18세의 홍안 소년이 선택한 방법은 전쟁이었다.

이러한 용기를 낸 소년도 대단하지만 따라준 병사들은 더 대단하다 하겠다.
병사들이 처음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보였을 리는 만무하나,
즉위 후 첫 전투에서 뛰어난 용병술로 백제를 박살내고, 동시에 거란까지 정리해버리는 솜씨를 보고
차츰 따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얻는 다는 것이 쌈만 잘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므로,
포상, 전리품의 분배 등에서도 충분한 만족을 주었을 것이다.
전쟁이 거듭되면서 이들은 대왕에게 더욱 열광하게 되었고,
무패의 전문 전투 집단이 되어 갔을 것이다.

무적의 군대로 후연과 싸워 요동을 확보하고 영토로 삼았으면서도,
신라와 백제를 남겨놓아 후대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원망스러운 평이 많으나,
이는 대왕의 실책이라기 보다는 한반도의 인문지리적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었다.
한반도는 고래로 만주에 비해 기후가 온화하고 농사지을 땅이 많아 인구 밀도가 높았는데,
산지도 많아 방어에 용이하였고, 각지의 호족들 또한 만만찮은 무력으로 할거하고 있어,
요동과 달리 일거에 먹어 버리는 것이 불가능한 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무력으로 신라를 속국화하고 백제를 반속국화함으로써,
동질성의 씨를 뿌렸고, 이후 삼한통일이 한반도 구성 주민들의 명제가 되게 하였다.

민족혼의 화신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대왕이었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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