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흥광,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서 효소왕의 아우이다.
702년, 형이 16세에 사망하는 바람에 불과 10대 초반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
애가 어리므로 별수 없이 모후 신목왕후가 또 섭정하였다.
2대에 걸쳐 섭정을 하며 아들들을 지켜낸 신목왕후의 정치력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으나,
아무래도 정정이 불안하였는지, 대사면령을 내리고, 관리들의 직급을 올렸으며, 조세를 면제하는 등
선심정책을 남발하였다.
2년차에 신궁에 제사 지냈고 선대에 이어 당에 조공하였다.
이후에도 수시로 조공하였으며 김인문 사후 중단되었던 숙위도 부활하는 등 당과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였다.
일본과의 관계도 아직은 괜찮았는지 무려 204명에 달하는 일본의 사신을 받기도 하였다.
즉위 4년차에 장가를 갔으며, 기근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진휼하였고, 부유한 나라의 임금답게,
이후에도 나라에 기근이 들 때마다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7년차부터 친정을 하여 길고도 길었던 왕권 공백기를 마감하였다.
재위 11년, 출가한 김유신의 미망인을 부인으로 봉하고 곡식을 지급하였다.
호국영령을 위로한 셈인데, 이때부터 왕 노릇을 제대로 하였는지,
이듬해에 당 현종에게 책봉을 받았다.
이 해에 중앙관료기구를 정비하는 등 왕권강화에 시동을 걸었다.
15년에 조강지처라 할 수 있는 성정왕후를 출궁시켰는데,
합의 이혼이었는지 살 집도 마련해주고 재물도 풍족하게 주었다고 한다.
19년에는 파직되었던 김순원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김순원의 등장이다.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 일본의 서쪽 변방을 쳤다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20년에는 발해의 팽창에 맞서 북쪽 국경에 장성을 쌓았고,
21년에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였다 하는데,
실제로 지급한 땅은 얼마 안 되고 대부분은 기왕에 백성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의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므로,
정전제 고유의 이념 구현이라기보다는 세금 징수가 목적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경주 동남쪽에 성을 쌓아 일본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일본과 갈등이 심각해진 듯하다.
22년에는 당에 미녀를 바쳤으나 반품되었고.
27년에 사상 처음으로 상대등을 해임하여 전제 왕권의 위엄을 보였다.
30년에는 동쪽 해안으로 쳐들어온 일본의 병선 300척을 격퇴하였고,
가을에는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제 멋에 겨운 섬나라 개구리들에게 천하가 넓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32년에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에게 대아찬을 제수하고 명마 한 필을 하사하였으며,
백관들의 지침서인 백관잠을 지어 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다.
이 시기 발해의 무왕에게 두들겨 맞던 당 현종이 신라에게 발해 공격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현종은 604명의 객사를 보내는 한편 김윤중을 장군으로 임명해달고 했다고 한다.
성덕왕은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5만이나 되는 군사를 일으켰는데,
전쟁을 해보기도 전에 폭설을 만나 길이 막히고, 얼어 죽는 병사가 반을 넘기는 바람에 철수했다고
한다.
아마도 전쟁의 의지가 부족했을 것이다.
발해가 훌륭한 방파제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데 뭐 하러 원수를 만들겠는가?
어찌 되었건 이때부터 당은 신라에게 발해의 견제를 맡겼고, 그 대가로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권을 인정하였다.
648년 김춘추와 이세민의 분할 약정 이후 무려 87년 만이었다. 하여튼 이 뙤놈들.
35년에는 확보한 평양과 ·우두의 지세를 살펴보게 하였고.
재위 36년 만에 40대 후반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선왕 효소왕이 어린 아이라 10년간 아무 일도 못하였고,성덕왕 또한 너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신목왕후가 두 어린 아들들을 돌보느라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신목왕후는 요석공주의 딸이었다는데,
신문왕이 나라 셋팅 뿐만 아니라 마누라 셋팅도 잘한 셈이나, 어쨌든 거의 20년 동안 왕권이 공백인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러한 장기간의 공백은 야심가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불만 세력들을 충동질할 개연성이
충분하였으나,
국운 융성기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신목왕후가 대단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큰 혼란 없이 청소년기를 보내고 성년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 성덕왕의 행운이었다.
충분한 준비기를 거친 후 왕 노릇을 시작한 성덕왕은,
안정된 상황에서 각종 제도의 정비와 더불어 정전제까지 실시하는 등 모범적인 전제왕권국가를
구현하였고, 국가 운영을 본 궤도에 올릴 수 있었다.
숙명적인 당과의 관계는 발해의 융성 덕분에 이전 전쟁으로 인한 갈등이 완전히 소멸되어,
나당 동맹에 버금갈 정도로 친밀하였다.
같은 뿌리라도 할 수 있는 발해와는 그저 소 닭 보듯 하였고 당의 요청에 의한 한 차례의 출병 말고는
충돌이 없었다.
한반도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일본과는 서로 외왕내제의 체제였으므로 자존심 싸움을 지속하였는데,
나당 전쟁기에는 배후의 위협을 두려워한 신라가 저자세를 취하여 왜놈들의 허영을 잔뜩 채워주었으나,
이제 겁날게 없고 국력에 자신이 생긴 신라는, 왕성국을 칭하며 일본에게 번국을 강요하였다.
당연히 일본은 격렬하게 항의하였으나, 무시로 일관하였고 쳐들어오면 격퇴하였다.
이러한 무시전략은 후대로 이어졌고,
열받은 일본은 이후 본격적인 신라 침공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옮겼으나,
발해의 비협조로 무산되었다.
다행히 오래 재위하여 자칫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던 나라를 안정시켰고,
국력을 확충하여 후대까지 전성기를 이어가게 만들었다.
명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