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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column신라 : 46대 문성왕, 장보고를 살해하다

신라 : 46대 문성왕, 장보고를 살해하다

김 경응,
고생 끝에 왕위에 올랐으나, 6개월 만에, 허무하게 죽은 아버지 신무왕의 뒤를 이었다.

839년 왕위에 오르자 마자, 장보고에게 장군직을 하사하였다.
이듬해에는 당문종이, 억류하고 있던 국학생을 포함한 신라인 105명을 추방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뭔 사고를 쳤는지는 모르겠으나, 100명이 넘게 억류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중앙에서 피비린내 나는 왕권 다툼이 벌어지건 말건,
민초들은 먹고 살기 위해 험한 바다를 건너 무역에 종사했었다는 것과,
당시 당과 신라의 교류가 활발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 놈들이 이들을 죽이지 않고 추방한 것을 보면, 신라의 위상 또한 높았다는 것도 알 수 있고,
아무튼 민초들의 이러한 활동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결국 국가를 먹여 살리는 힘들 중의 하나가 되었으므로,
이것이 가능할 수 있게 한 장보고의 청해진은 한낱 정쟁의 도구가 아니라,
민초들의 삶과 국가를 지키는 파수꾼이기도 했다.

반면에 백성들의 집에 죽이 끓는지 밥이 끓는지, 관심이 없던 골품 귀족들은 권력 싸움에 영일이 없어서 문성왕 3년, 홍필의 반란 모의가 있었다.
반란의 시대의 개막이었다.
조강지처 박씨는 어찌되었는지 모르나, 4년에 이찬 김위흔의 딸을 왕비로 삼았는데,
사돈 약속을 지키라는 장보고의 항의를 받았다.
그래서 이번엔 장보고를 달래기 위해 장보고의 딸을 차비로 삼으려했으나,
골품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에 열 받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왕은 군사를 동원하여 진압하지 않고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암살하여, 돈줄인 청해진을 유지시켰다.
군사를 동원하여 제대로 붙었으면 어찌되었을지는 모르나,
비열한 방법으로 장보고를 죽이는 바람에,
반 독립적인 청해진의 거대 해상 세력과 원한을 맺게 되었고, 이후 두고 두고 정권의 부담이 되었다.
재위 7년째의 일이었다.

나라야 산으로 가든 바다로 가든, 골품귀족들의 반란 러시는 이어져,
이듬해엔 이찬 양순이 모반하였고,
11년엔 이찬 김식이 반란의 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13년엔 용단을 내려,
징그럽게 말 안 듣는 청해진을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벽골군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속은 시원했을지 모르나 이제 중계무역은 누가 한다는 말인가?
재위 19년째인 857년, 숙부 김 의정에게 왕위를 넘기고 왕 노릇을 마감하였다.
반란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왕위 다툼으로 인한 혼란과 비극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문성왕이었으므로,
왕권 강화만이 나라를 안정시키는 열쇠가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땅에 떨어진 왕의 권위와 비대해질 때로 비대해진 골품 귀족세력들 때문에,
왕권강화는커녕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대의 은인이며 현재의 친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장보고는,
문성왕의 든든한 배후세력이었고,
청해진의 중계무역은,
선대와 마찬가지로 자연재해와 반란에 시달렸던 문성왕에게 막대한 도움을 주는 돈줄이었을 것이다.
문성왕이 장보고를 잘 달래어 그 세력을 온전히 흡수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더라면,
국가를 환골탈태 시킨 중흥군주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골품귀족들에게 굴복하여 구원의 동아줄로 목을 매어 버린 듯하여 안타깝다.

김경순
김경순
실존은 본질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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